Michelle Grabner
Gingham Time
20 June–20 July, 2024
Gingham Time

우리 눈에 흔한 모양으로 정착한 듯했던 깅엄gingham·격자무늬 면직물. 한 아티스트에 의해 새로운 진화의 세계가 펼쳐졌다. 미국 개념미술가 미셸 그라브너Michelle Grabner는 집안 곳곳에 오밀조밀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브제에서 사회의 권력 구조를 드러내는 코드code를 읽고 이를 추상회화로 표현하는 데 30여 년을 바쳤다. 작업실에서 곧잘 명상에 잠기곤 하던 그라브너가 식탁보에 그려진 격자무늬를 주목하고부터이다.

귀족들만이 수놓은 옷을 입던 여성의 역사에서 18세기에 영국이 공업화한 뒤로 일반 여성도 격자무늬로 짜인 하우스 드레스를 입으며 아름다울 권리를 얻은 동시에 손바느질 노동에서 벗어났다. 그야말로 새 세상, ‘깅엄 세상’이었다. 사회적 계급 구분 없이 폭넓게 쓰인 이 면직물은 특히 19세기 미국에서 가정용 원단으로 자리 잡으며 오늘날 어디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단순하지만 친숙한 격자무늬는 주식시장 붕괴, 베트남전, 소련 해체 등 혼란기마다 사람들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여성의 노동생산성뿐만 아니라 꾸밈에 대한 욕구, 마음의 안정까지 담아내는 깅엄에 매료된 그라브너는 이를 캔버스가 아닌 삼베burlap 위에 섬세하게 옮겼다. 굵은 올 몇 가닥을 빼낸 조각에 무늬를 그린 뒤 빈틈에 색을 채운 이 작업은 정형화한 사각 틀에 가두지 않고 마름모꼴과 원형으로 만든 패널panel을 활용했다.

그라브너가 오랜 세월 추구해온 원형 회화 시리즈는 14~16세기 르네상스 때 특히 이탈리아에서 장식 예술로 유행한 톤도tóndo에서 영감을 얻었다. 톤도란 고대에 만들어진 둥근 그림이나 부조인데, 주로 성모마리아와 예수를 그렸다. 그런 쟁반과 메달은 아기 출산을 축하하는 선물로 쓰였으며, 집안을 꾸미는 공예품이 되었으므로 이 또한 직물織物 오브제처럼 여성의 전통적 역할에 관한 일반화한 생각을 품게 한다. 그러나 그라브너는 톤도의 공예 요소를 응용한 원형 회화에 거미줄처럼 뻗어가는 방사형放射形과 중심을 벗어난 점에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감기는 아르키메데스 나선Archimedes spiral을 그렸고, 뒷면에 작은 의자와 사진, 네모꼴 회화를 함께 두어 공간과 예술 언어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하였다.

이번에 에프레미디스 서울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그라브너는 처음으로 방사형이나 나선이 아닌 격자무늬를 그린 원형 회화 신작 열여덟 점을 발표한다. 이 새로운 시도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보나르가 둥근 탁자를 덮은 빨간 체크 식탁보에 고풍스런 그릇과 꽃병, 풍성한 과일이 어우러진 집안 풍경을 그린 회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전시장의 하얀 벽에 그림 속 식탁처럼 걸린 원형 회화에서 선명한 빨간색과 흰색 그리고 짙고 옅은 분홍빛이 눈에 띈다.
작품들은 사회 현상과 개개인의 일상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예측 가능한 미래로 이어지는 물리적 시간을 따라 격자무늬처럼 얽혀 역사가 반복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얽힘에 가려진 공간은 실재하지 않는 저 너머 환상 세계이다. 같은 듯하면서도 색깔과 질감이 미세하게 다른 무늬는 이를 이루는 수많은 씨실과 날실이 흔들리거나 갑작스럽게 끊김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서서히 반복하여 퍼져가면서 알 수 없는 힘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치 작가가 어디엔가 도돌이표를 넣은 듯 아름다운 선율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듯한 격자무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사유의 세계에 빠져 그 감흥을 표현할 자기만의 예술 언어를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킬 듯하다.

미국에서 태어나 예술가와 교육자로 살아온 그라브너는 자기만의 감각으로 걸러낸 미술사를 바탕으로 삼아 비평가로도 활동한다. 2014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팅을 맡았고, 남편 브래드 킬람Brad Killam과 비영리 문화공간을 운영하며 지역사회와 소통한다.
<리아뜰 매거진> 편집장 이고은

Untitled, 2024
oil on burlap
106 cm (ø)
Untitled, 2024
oil on burlap
106 cm (ø)
Untitled, 2024
oil on burlap
106 cm (ø)
Untitled, 2024
oil on burlap
64 cm (ø)
Untitled, 2024
oil on burlap
61 cm (ø)
Untitled, 2024
oil on burlap
61 cm (ø)
Untitled, 2024
oil on burlap
152 cm (ø)
Untitled, 2024
oil on burlap
60 cm (ø)
Untitled, 2024
oil on burlap
91 cm (ø)
Untitled, 2024
oil in burlap
60.5 cm (ø)